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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2호] 한국인 피폭자 조선 왕족 이우(李鍝) 전하

관리자 2018-01-17 (수) 17:39 6년전 2072  

한국인 피폭자 조선 왕족 이우(李鍝) 전하

                                

전시관 관장 高橋公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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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 전하

  이우 전하를 알게 된 발단은 일본 히로시마에 건립된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5년이 되는 1970년 4월 10일 히로시마에 한국인 피폭자의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비가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1990년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1997년 합천에 「한국 원폭 위령각」을 건립하였는데, 원래는 1995년에 위령각이 아닌 위령비를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때 어떤 위령비를 건립할까 많은 고민을 했었다.


  ‘히로시마의 위령비와 같은 위령비를 건립한다면 한국에서도 좋아 할 것이겠지?’ 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결국은 위령각을 건립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한국인 피폭자에 관련된 책을 보면 항상 히로시마의 그 위령비에 관한 것을 접하게 된다.


  나는 그 위령비를 볼 때마다 「정말 훌륭한 위령비이다. 이 위령비를 재일교포들이 만들었을까? 하단에 거북이돌, 제일 위에 용석, 높이가 5미터, 무게가 10톤, 검은 오석으로 위령비 시설을 보면 건립비용이 1천만 엔은 족히 들었을 것 같다. 재일교포의 피폭자에 대한 성의와 진심이 보인다. 정말 좋다.」고 생각하면서 솔직히 기뻐했었다.


  어느 날 어떤 책에서 「히로시마에 있는 한국인 위령비는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에 건립하는 것을 거부당해 공원 바깥쪽 인적이 드문 모토가와교 후모토에 한국인이 중심이 되어 세워졌다. 일본 정부나 기업에서는 기부금을 내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어 왜 이렇게 일본은 한국인에게 냉정한가 하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고 분노도 느꼈었다.


  그런데 후에 한국인 피폭위령비가 왜 평화공원 내에 건립되지 않고 후모토에 세워졌는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우 전하는 의친왕 이강의 차남이다. 조선왕조 26대 고종과 장상궁 사이에 의친왕 이강(李堈)이 태어났고 의친왕과 엄비 사이에 영친왕 이은(李垠)과 차남 이우(李鍝) 전하가 태어났다. 이우 전하는 일본의 학습원을 거쳐 육군사관학교(45기)에 들어갔으며 피폭 당시에 계급이 중좌이었다.

  원폭이 투하될 당시 일본군은 제1군 도쿄와 제2군 히로시마로 크게 두 개로 나눠져 있었고 히로시마는 그만큼 일본군의 최고로 중요한 곳이다.


  이우 전하는 용모가 수려한 뛰어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이우 전하는 당시 히로시마 제2군 교육참모로 배속되었고 나이는 32세의 중좌이었다. 왕족으로 일본은 예우 차원에서 요시나리(吉成)라는 일본인 중좌가 이우 전하의 신변 안전과 경호 임무를 맡고 있었다.(요시나리는 애초 이우 전하를 감시하고 상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띄고 왔으나 이우 전하의 인품과 배포에 매료되어 완전히 그의 사람이 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원폭이 투하된 운명의 8월 6일, 이우 전하는 말을 타고 제2총군사령부에 출근하는데, 원래 요시나리 중좌가 동행해야 하는데 몸이 불편하여 이우 전하 혼자 사령부로 가는 중이었다. 폭심지에서 700m 거리인 후쿠야 백화점 주위에 왔을 때 원폭이 투하되었다. 폭심지에서 700m, 그것도 말을 타고 있었다면 폭풍에 날려가 즉사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이우 전하는 폭풍에 휩쓸리지 않았고 말을 타고 사령부로 달려가는 도중 모토가와교 근처에 왔을 때 쓰러지게 된다. 이우 전하는 다음날 서거하셨다.
 
  즉 한국 원폭자 위령비는 평화공원 내에 건립을 일본 측이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왕족인 이우 전하가 피폭을 당해 쓰러진 그 장소,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의미가 깊은 장소이기 때문에 그곳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위령비 뒷면을 보면 육군사관학교 제45기 동기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동기생들은 모두 일본인인데 일본인도 기부금을 내지 않았을까? 그래서 위령비에 이름이 새겨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당시 이공 전하의 어부무관으로서 신변 경호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자책한 요시나리 중좌는 할복자살을 했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이 한반도에 침략하여 일본인 때문에 한국인이 죽은 일은 많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해서 한국인을 위하여 할복자살한 일본인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도 기억해 두고 싶은 일이라 생각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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