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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10) <한국 첫 방문>

관리자 2019-10-11 (금) 14:56 4년전 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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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행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와 한국의 인연은  잘 익은 연시가 자연적으로 나무에서 떨어질 정도였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장례식에 나를 마중 온 자가용은 그 당시 보기 드문 2천㏄의 대형차였습니다. 장례식장까지 30분 정도 운전해 주시는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날은 평화에 대한 말이 오갔는데, 나는 일찍부터 평화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평화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운전사가 말했습니다.
  “평화에 관하여 잘 아시는 것 같은데, 평화의 지식을 가지고 평화의 사상을 말하는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평화는 사회에 현실적으로 살지 않으면 가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평화를 생각하신다면 우리나라에 한 번 오셔서 현실을 보고 평화를 생각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우리나라 라니요?”
  그날 운전하시는 분은 지바(千葉)라고 하는 재일교포였습니다. 한국에 관한 책을 3개월 전부터 읽고 있던 내 머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는 상태이기에 더 이상 반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일본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자가 무슨 평화를 말할 수 있는가. 먼저 현실을 봐야겠다.’
  그리하여 한국을 방문할 날이 결정된 것입니다.
  1973년 4월 3일,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그날 밤, 지바 씨가 준비해 둔 민가에 숙박하게 되었는 데, 4인 가족으로 손수 만든 저녁 밥상이 나왔습니다. 한 상 가득히 차려져 있는 음식은 국까지 새빨갛습니다. 맵지 않은 것은 밥과 김뿐이어서 전혀 손이 가지 않아 김과 밥만 먹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지바 씨 “다카하시 씨, 우리나라 음식을 맛있다, 맛있다 하고 먹지 않으면 평화를 두 번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한국말로 「맛있다」라고 하십시오.”
  ‘그렇다. 그 나라를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음식문화부터 융화되어야겠지.’
  그러나 매운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입안은 불이 붙은 것 같이 화끈거리고 야채를 먹어도 고기를 먹어도 모두 매워서 맛을 모르겠습니다. 아~곤란하다. 말도 못하고 땀만 뻘뻘 흘리며 첫 번째의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다음날 광주에 갔습니다. 300명 정도 모인 전라도 회관에서 인사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일본은 바다로 둘러싼 나라로서, 여러 가지 문화나 문명이 외국에서 들어왔습니다. 불교 문화는 지금부터 1,500년 전에 한국의 백제의 성명왕이 전해주었습니다. 실로 일본불교를 낳아준 부모입니다. 1,500년 전에는 조선 사업이 발달 되지 않았던 시대로서, 일본에 목숨을 걸고 전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열정 속에서 불교와 약학, 천문학, 역법, 그 외 의식주까지 전반에 걸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본의 45대 성무천황이 일본 전국에 66개소에 국분사를 지었는데, 그 총본산으로 나라(奈良)에 동대사를 지었습니다. 그때 절을 짓는 사람의 60%가 한국 사람이었다 합니다.
  불교는 은혜를 중요시합니다. 보은의 중요함을 말합니다만, 한반도의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은혜를 입고 일본은 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은혜를 짓밟은 짓은 일본 사람으로서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종종 한국에 와서 여러분과 같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면서 조금이라도 한국을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빈곤하여 재산은 없지만, 언젠가는 내 재산 모두 한국에 가지고 와서 여러분과 같이 살면서 여러분의 선조가 잠들고 있는 곳에 나도 영원히 잠들고 싶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때부터 내 옆을 떠나지 않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나에게 “한국에서 일본에 건너가 사는 것은 알겠지만, 일본에서 이렇게 빈곤한 한국에 와서 살겠다고? 그리고 우리들과 같은 땅에 묻히겠다고? 정말 가슴이 뭉클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할 말은 없지만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 기쁘다” 라고 하십니다.
  다음날 광주역에서 배웅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보니, 어제 그 할머니가 어깨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는가. 겨우 이틀밖에 같이 있지 않았는데 저렇게도 석별의 정이 아쉬운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날로 중학교 2학년생인 미라 양이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또 언제 올지 모른다는 내 말에 울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미라 양과 겨우 이틀밖에 같이 있지 않았는데 말도 통하지 않았는데 이렇게도 슬퍼하는 것일까?
  공항에 도착하니 남산공원에 안내해준 김 양이 와 있었습니다. 탑승구 안으로 들어갈 때 미라 양과 김 양도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비행기는 어두운 창공을 날아 구름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새빨간 태양이 눈부시게 빤짝이며 나를 반겨 주었습니다. 새빨간 태양에 새하얀 구름이 핑크빛으로 불든 대 운해의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신비스러운 세계를 본 것은 처음이라 감동에 휩싸여 창밖을 바라보니, 미라 양, 김 양, 그리고 광주의 할머니, 눈물을 흘리는 세 명의 모습이 저 멀리 핑크빛 구름 위에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아!!”
  그때 내 눈에는 폭포와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한국병」
  지금 생각하면 틀림없이 한국병에 걸린 것은 1973년 4월 8일 저녁 7시 반경의 한국 상공의 비행기 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속아도, 바가지를 써도, 힘들게 해도 한국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한국에서 도망가지 못하는 한국병, 그 한국병에 걸린 것은 태양 빛에 비추어진 핑크빛 구름 위의 세 명의 여성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7년, 이 병을 낫게 할 약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고 병은 점점 더 깊어만 갑니다.
  나는 다른 병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병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사망원인은 한국병이라고 사망진단서에 기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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