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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꽃 『문주란(하마유)』 한국에 분근(2003.5.)

관리자 2018-03-04 (일) 12:12 6년전 5550  

2003 반전의 꽃 『문주란(하마유)』 한국에 분근

 

‘반전·평화’상징 문주란 합천에 왔다


◀내 고장 화제▶
- 일본인 2명, 원폭복지회관에 3포기 이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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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좌), 니시무라씨가 5일 합천 원폭피해자 위령탑 앞에서 문주란을 심고 있다. 송본근 기자

5일 오전 경남 합천군 합천읍 ‘원폭복지회관’내 위령각 앞 뜰, 50여명의 원폭 피해자들이지켜보는 가운데 문주란 3포기를 심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현해탄을 건너 온 이 꽃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에서 평균 섭씨 7000도를 이기고 살아남았던 한 포기의 후손, 이 난은 합천 피폭자 돕기에 앞장서 다카하시 고준(일본 태양회 이사장)와 반전·평화운동을 전개 해 온 니시무라 이치로(도쿄 생활공동조합 직원) 등 2명의 일본인이 가져 온 것이다.


이들은 한국의 원폭 피해자 300여명이 합천호에서 야유회를 즐기는 날에 맞춰 문주란을 이식했다. 일본 태양회는 1989년부터 해마다 합천을 찾아와 피해자들의 야유회를 지원하고 있다.


다카하시 고준은 "합천 원폭 피해자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 반전과 평화를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고 싶다"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원폭피해자의 화신'으로 대우받는 문주란을 니시무라는 가나가와현 원폭피해자 초대 회장을 맡았던 오지마 료헤이 집에서 6년 전 직접 구해 번식 시켜오다가 이번에 가져왔다.


한국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심진태 지부장은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낯선 곳을 떠돌던 희생자들이 돌아 온것 같다"며"겨울에도 얼지 않게 잘 기르겠다“라고 말했다.


한국 원폭피해자협회는 문주란 3포기를 계속 번식 시켜 전국 지부에 나눠준 뒤 희망자에게도 분양 할 계획이다.


중앙일보 김상진 기자 2004년 5월 6일 목요일 제12234호 40판(중앙일보)

 


폐허 속에 살아 남아....'원폭피해자 화신으로 보급'
히로시마 문주란=니시무라에게 꽃을 분양해준 오지마는 히로시마 주둔 일본군 부대에 근무하다 피폭으로 중상을 입었던 인물로 원자 폭탄이 떨어진 4개월 뒤 자신이 근무했던 부대로 둘러보러 갔다가 그 곳에서 살아남은 문주란을 발견했다.
이 문주란은 오지마가 원자 폭탄이 떨어지기 몇 개월 전에 히로시마에서 한포기 구해다 부대 안에 심었던 바로 그 꽃이었다.
원자 폭탄이 터지는 순간 최고 온도가 30만도 인 데다 초속 440미터의 강풍을 동반하기 때문에 폭심지 주변에는 동·식물이 살아남을 수 없지만 문주란은 원자 폭탄을 이겨 낸 것이다.
오지마는 문주란을 자신의 집에 옮겨 심고는 반전.평화의 상징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희망자가 있으면 문주란을 갖다 주고는 원자폭탄의 공포를 설명해 줬다. 그 후 반전운동 단체를 통해 문주란은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히로시마 평화의 공원에는 문주란 화단까지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2004년 5월 6일 목요일 제12234호 40판(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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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피해자 야유회에서 문주란을 증정하고 있는 니시무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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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원폭 복지회관의 위령각 앞에서 문주란 기념식수를 마치고

 

 

일본인 피해자도 그에 상당하지만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피해자 이기도하다. 진정한 원폭피해자는 한국인 피해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본은 전쟁이 끝난 후 재빨리 부흥을 되찾아 원폭원호법을 성립시켜, 피해자 전문 병원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한국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는 일본이 군사력 이라는 점령으로 한국을 식민지하에 두고 강제 연행 등의 탄압정책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했고 생활을 위하여 일본으로 가야만 했던 운명 이였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1945년)그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200만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개명되어진 채 일본 땅에서 피폭을 당항 한국인은 10만 명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자유를 찾은 한국 사람들은 계속하여 조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은 바다에 접해져있어 북한, 중국, 그 당시의 소련 등의 공산국을 목적에 두고 군사국가로 되기 좋은 지리조건에 놓여 있어서, 그 대신 사회복지에 관한 정치는 늦어졌다. 내가 처음 한국인 원폭피해자 지부와 그 가정을 방문한 것은 지금부터 16년 전의 일이다. 일본인 피폭자의 생활과 그에 따른 의료기관등이 이들 간의 격차가 너무나도 심하기 때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여 그해부터 한국 피해자에 대한 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여력도 없었고 다른 한국 원폭피해자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원폭피해 합천 지부에 년 2회의 원조로 봄 야유회와 8월 6일 원폭 위령자 추모회의 비용을 부담해왔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당시 건물들은 순식간에 파괴되고 인체는 녹아버리고 초목은 모두 말라버렸다. 특히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부근에는 70여 년 동안 초목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처참하게 불탄 메마른 자리에서 오직 문주란(일본명:하마유)만이 살아남아 있어 이 꽃을 반전의 꽃으로 지금까지 소중히 키워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것은 작년 12월의 일이였다.


이 사실은 가르쳐 주신 분은 일본 태양회 사무국장인 야마시타氏인데 이분과 같이 그 문주란을 키우고 계신 분이 니시무라氏 와 만난 것이 지난 3월이었다.


니시무라씨가 문주란을 가져올 시기가 언제가 좋을까?
조속히 한국 원폭피해자 회장과 상의한 결과 서울본부와 부산지부는 땅이 없어 심을수 없고 태양회가 매년 지원하고 있는 합천지부에 원폭 위령각 앞뜰에 심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의견과 5월5일에 행해지는 합천지부 야유회 때 심자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니시무라씨가 문주란을 가지고 한국에 올 날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니시무라씨에게 받은 자료를 참고로 급히 자료를 조사하여 ‘문주란 분근에 대하여’ 라는 글을 써서 관계자에게 배부했다.


한국에도 있는 평범한 문주란 꽃을 왜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져 와야 하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면 가지고 오는 니시무라씨도 기증받는 원폭피해자 측도 아무런 보람이 없을 것이다. 중계역할을 하는 태양회로서는 아무래도 문주란에 관한 자료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니시무라씨와 이 메일로 주고받고 하는 동안에 이 쪽에서 10그루라는 결정을 내렸는데 그 중 큰 것이 직경 15센티미터, 작은 것이 8센티미터에 길이가 1미터라고 하는데 이 10그루 모두 합하면 상당히 큰 것으로 된다.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태양회에서는 소년.소녀부 합창단이 합천까지 가서 식수한 문주란 꽃 앞에서 문주란 노래를 부르게 되어있고 합천군외 지방유지 분들이 참석 하신다면 1.2그루는 너무 빈약하고 적어도 3.4그루는 심어야겠다.


그 외 한국 원폭 피해자, 6개지부와 태양회에도 반전의 꽃으로써 심고 싶다면 아무래도 10그루는 필요할 것이다.


5월 3일 오전 10시 니시무라씨 마중을 위해 태양회 사무실을 출발 도중에 한국 원폭피해자 중앙협회사무실에 들려 회장 대리인 부회장 김성락씨와 같이 2시에 인천 공황으로 갔다.


3시 20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3시 4분에 무사히 도착, 니시무라씨는 4시경 밖으로 나왔다. 그날 7시, 태양회관에서 니시무라씨 환영회를 위해 원폭피해 관계자 9명,도봉구 자원봉사 센터 2명, 태양회 회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원폭피해자 서울 지부장 박영표씨의 사회로 시작 명정강 태양회 부회장과 원폭 피해자협회 김성락 부회장의 답사, 그리고 이번에 급히 만든 문주란 노래 (바다여 가르쳐 주세요)의 합창이 아름다운 한복 차림의 20여명의 태양회 합창단의 장내는 성황을 이루고 계속해서 환영가가 연달아 나와 결국 예정시간을 30분 초과하여 9시 30분에 즐거운 환영식은 모두 끝났다.


5월 4일 부산에 도착한 니시무라씨, 태양회 부산지부 대표분들과 즐거운 저녁식사를 마쳤다.
5월 5일 아침 6시30분, 부산출발, 9시 10분 원폭 피해자 복지회관 도착, 조속히 문주란을 심을 장소를 확인 뒤 입간판을 썼다. 올해의 야유회 장소는 일본사람이 만든 합천댐 근처 합천호에서 개최되니 그곳에서 정식적인 인사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아 복지회관 관장님과 니시무라씨 그리고 관계기관 유지 10여명이 문주란 3그루의 식수를 마치고 태양회 소년, 소녀부의 합창이 끝나고 기념촬영, 니시무라씨는 2개 신문사에 의해 인터뷰를 받게 되었다.


이 식수 기증식이 끝난 즉시 야유회 장소인 합천호로 갔다. 이미 약 300여명의 피해자 분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여기서 먼저 원폭 협회 부회장 김성락씨의 인사 말씀에 이어 피해자 합천지부장 심진태씨의 인사 말씀에 의하면 합천지부에는 원폭피해자가 600여명이 있고  그 범위도 넓어서 버스로 오시는 등, 그리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적어서 연 1회의 야유회 자리를 빌려 현황 발표를 하는 전체 화합 날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겨우 본격화된 일본 정부의 한국 피폭자에 대한 때늦은 원조에 대한 대응책, 방법 등을 이렇게 모인 날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으니까 길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합천 심의조 합천 군수님의 인사 말씀이 끝난 뒤 나는 니시무라씨를 소개 했다. 니시무라씨 댁엔 50그루 정도의 문주란이 크고 있는데 그 중에 10그루를 가지고 오기위해 전 날 오후 1시부터 시작하여 6시간 동안에 걸쳐 문주란을 흙 하나 없이 깨끗히 씻어 세관 통관을 염두에 두고 심혈을 기울려 장시간에 걸쳐 준비해 온 것이다.

그러나 니시무라씨는 그런 고생담은 한마디도 없이 이 꽃은 히로시마 원폭평화 공원에도 심어져 있으며 원폭의 ‘하마유(문주란)’ 라는 작은 팻말까지 있고. 어떤 경로로 어떻게 해서 일본에서 이 꽃이 생겼는가 하는 경위를 말씀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천황과 군부에 의해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게 한 것은 대단히 죄송한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원폭 하마유(문주란)’를 가지고 왔습니다.


히로시마의 코이마치에 있는 어느 농가에서 식량난의 의해 밭을 넓히기 위해서는 전쟁에 출병한 아들이 소중하게 키워 오던 문주란 꽃을 버려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오지마 료헤이 병사가 얻어 와서 히지마야 병사의 안 뜰에 심어 놓고 키워 왔습니다.


8월 6일 원폭으로 병사가 재난을 당해 일순간에 메말라버린 산으로 변하고 많은 군인들이 사상을 당했습니다. 중상을 입은 오지마씨는 치료를 한 뒤 그해 11월에 또 다시 옛날 병사에 가보고 돌아가신 전우들을 생각하며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뒤 무심코 안 뜰을 바라보니 메말라버린 땅속에서 가느다란 하마유(문주란) 잎이 나와 있었습니다.


오지마씨는 그 하마유를 가지고 고향인 카나가와현 카마쿠라시에 가지고 와서 자기 집 앞 정원에 심어 놓고 소중히 키워 왔습니다.그 후 그 피폭 하마유는 반전.평화의 심벌(상징)로 피폭자들이 잠들어 있는 절과 히로시마 평화의공원 등에 심어 놓았는데 매년 초여름이 되면 하얀 꽃이 피고 있습니다.


한국 다음에는 브라질에 있는 피폭자 단체에 기증할 생각으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각지의 피폭 하마유가 꽃을 피워 원폭과 전쟁이 없는 평화스러운 세상이 되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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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씨 환영회(문주란 노래를 부르는 부인부 합창단)​


니시무라씨의 인사 말씀이 끝나고 태양회 경남 본부와 부산지부 의 소년.소녀부의 합창단이 또다시 문주란노래를 불렀다.


 엊그저께 한복차림의 20여명의 부인부 합창단이 니시무라씨를 환영하는 뜻 에서 문주란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를 작곡한 신대철씨가 직접 연습 지도를 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소년.소녀부 합창단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지 못하고 테잎을 듣고 연습한 것이 전부지만 노래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하듯이 소년.소녀부의 귀여운 목소리로 부른 노래 이것 또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는지 몇 분이 눈시울을 적시고 계셨습니다.

 다음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노래자랑 대회로써 올해도 예전과 같이 60명분의 상품을 준비한 태양회도 같이 어울려 노래자랑을 하려고 하였지만 그날 오후 6시경에 부산지부 원폭피해자 분들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었다.
 5월 5일을 어린이날로서 돌아가는 길이 많이 지체될 것 같아 식사를 마치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야우회 장소를 떠나왔다. 유감스럽게도 부산 지부장님은 입원중이였지만, 부지부장 외 일본어가 유창한 분들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강상석 부지부장, 나가사키, 원폭 미츠코시 징용동지회 이강녕 회장, 이분은 오랬동안 법정투쟁 한 끝에 드디어 피폭재판에서 이긴 공로자이시다. 또한 같은 부산지부의 강정수 부지부장은 구 일본 주소가 히로시마 히지야마쵸 65번지로 되어 있고 삼동 모터스라는 자동차 정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니시무라씨가 가져 온 (하마유)는 히지야마의 육군부대의 관사의 정원에 있었던 것이어서 이야기의 꽃은 한층 더 무르익어갔다. 그 분은 히지야마의 산 모양까지 그리면서 문주란의 원근자이신 오지마씨가 소속되어있던 6180부대는 이 쪽 산 부근이었고 이 부대의 차량은 모두 삼동모터스에서 정비했다. 즉 자신이 정비했다고 하는 소중한 추억담을 들은 니시무라씨는 ‘저는 그 니시무라씨의 아들과 잘알고 지내니까 사진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그 아들에게 주면 대단히 그리워하실 것입니다.’


그런 뒤 그 곳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재회를 약속하며 7시 30분경 부산 지부를 나왔다.다음날 6일, 부산8시발 고속전철로 천안시를 향했다. 목적은 ‘망향의 동산’과 ‘독립기념관’ 견학이다. 망향의 동산은 약 15만평 되는 아름다운 산기슭에 3만여 평이 묘지로 되어있는데 현재 약 5천2백기의 한국인 묘지가 있다.


이곳에서 박종원과장으로 부터 친절한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일본에 강제 연행되어 석탄, 터널, 강천 등등, 강제 노동하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며 일본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의 묘소이다.


실은 내년에 일본에 있는 ‘원폭의 불’을 한국에 분화하여 그 기념석탑을 건립함에 있어 어디가 좋을지 한국원폭피해자 협회장님과 상의 했을 때 만약 허용이 된다면 천안의 망향의 동산이 어떻습니까? 라는 안건이 나왔다. 나도 작년부터 여러 곳에 후보지를 선정하여 찾고 있던 중으로 서울에서 1시간정도 걸리는 망향의 동산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보지의 하나가 우연히도 이렇게 일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책에서 본 것뿐이므로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니시무라씨는 도쿄의 우에노에 있는 ‘원폭의 불’을 지키는 회원이기도 하다.


"어떻습니까? 원폭의 불의 분화는 망향의 동산을 하나의 후보지르 하면?"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가보았는데, 니시무라씨와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곳은 무궁화, 장미, 목단으로 크게 3종류로 구분되어 그 나름대로의 꽃으로 아름답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6천만 명의 묘소, 댐 건설로 희생당한 4천명의 묘소, 또 현.별(도.별)로 되어있는 묘소도 있고, 그것도 내 고향인 미야기현에서 희생당한 분들의 묘소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야먀가타현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때 미야기현의 경계지점에 오모시로산 터널이 있고 우리들 어린학생들은 흥미 깊고 닥치는 대로 그대로 듣고 보고 있을 나이여서 이 터널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서로의 얼굴을 꼬집으면서 "아! 오모시로이, 오모시로이, 오모시로이"하면서 장난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 오모시로산은 암벽이 견고해서 종종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나와 많은 조선인 희생자를 낸 곳이고 그 터널의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가 조선인의 희생자라고 한다. "누가 지었을까. 오모시로산 터널이라고? 우리들 한국인 입장에서는 슬픈산, 쓰라린 원망스러운 산이기도 하다."고 하는 한 글귀를 보았을 때, 문득 초등학교 시절의 여행 정경이 떠올라 일순  그 심이 뜨거워진 일을 기억하고 있는데 ‘미야기현 희생비’ 앞에 섰을 때 또 다시 그 기억이 가슴을 찔러 말문이 막혔다.


이 묘소 중앙에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죽어간 영령들을 상징하는 듯 한 크나큰 동상이 있다. 어두움 속에서 광명을 구하는 것 같이 태양을 받아들이는 듯 한 그 동상 밑에 한국의 시인 이은상이 읊은 시가 적혀 있다.

여기는 조국의 땅
꿈속에서도 바라보던 조국의 땅
그대들 돌아오라 기다리던
망향의 동산
봄이면 진달래 피고
가을이면 들국화 피고
해와 달이 번갈아 보호하는
망향의 동산
고난의 세월 다 지난 오늘
돌아와 조국의 품속
이 안식의 동산에
포근히 안겨 잠드소서!

서툰 일본어로 이런 뜻을 아내가 옆에서 번역해 주었을 때 더욱더 절구하고 원폭의 불은 어디에? 라는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과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전송 속에 그곳을 나와 다음은 독립기념관으로 향했는데 높이 51m의 거대한 탑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다. 100만평이 넘는 땅에 일본의 침략을 중심으로 한 7개의 대 전시관 이였다.


이번에는 문주란이 주제이므로 자세히는 잘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지금도 한일 합병은 정통이다, 합법이다. 라고 하는 일본의 어느 정치가에게 이 독립기념관은 꼭 한번 보여주고 싶다.


목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에 5~6대의 대형 버스가 줄지어 서있고, 그 속에서 학생들이 줄지어 나와 일제침략의 일본인들이 과거의 죄상을 돌아보고 있다.


이 거대한 기념관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진정한 한·일 우호는 생기지 못할 것 같다.


이번기회에 니시무라씨는 흙탕물과 격투하여 가지고 온 문주란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한·일 우호의 크나큰 도움을 주는 한 송이 꽃이 되고 현해탄을 건너는 하나의 징검다리로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니시무라씨의 노력과 성의에 깊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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